그림은 잘 그리든 못 그리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위트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가 자연스럽고 친근한 놀이 중의 하나이다. 우리 두 딸만 보아도 그림은 즐겁기 위한 행위이지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리는 것은 아니다. 앉은 자리에서 공주를 무려 열 댓명은 순식간에 그릴 정도이니.
그림 그리기가 왠지 겁이 난다.
어린 시절, 아마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그림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또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편에 속했던 나는 좋은 평가를 받곤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도 크지 않았나 회상한다.
미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미대 진학을 권유하였으나 나는 나의 실력이 절대 좋지 않을 뿐더러 미술적인 소질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의 우리 집안 형편으로는 미대는 고사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 자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마 미술 선생님으로서 미대에 학생들을 보내는 것이 본인의 실적일 수는 있었겠으나 나에게는 적잖은 부담이었다. 나는 그저 미술이 좋아서, 그림이 좋아서 미술부에 들어왔던 것 뿐이었다. 잘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 종이에 색감을 입히는 과정이 작은 희열이었기 때문이다. 연필이 스케치북을 스치는 '슥삭'하는 소리도 듣기에 무척 좋았다. 그 이후로 분명 소질이 없어 미대 진학을 꿈꾸기 어려웠음에도 비교적 유복한 친구들이 데생을 하고 레슨을 받는 모습에서 열등감을 느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잊고 신나게 그림을 그렸던 나는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나와 걸맞지 않고 멀게만 느껴졌다. 의식적으로 내가 밀어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다.
그 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마흔이라는 나이에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채웠다. 회사 업무 중에 받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고 부정적인 사고로 가득 차있는 내 마음을 정화하고 싶었다. 대학 시절에도 마음이 답답할 때면 시립미술관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미술 작품을 찬찬이 들여다 보고 나면 목욕하고 나온 것 마냥 개운하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들에 핀 민들레도 그려보고 싶고 우리 딸 함박 웃음도 그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큰 일이었다. 막상 미술도구도 조금 사 모으고 스케치북도 준비했는데 그 하얀 도화지가 막막하고 두렵기만 했다. 나 좋자고 그림 그린다고 해놓고 ‘남들이 보았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 비웃지 않을까, 이 정도는 그려야 그린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로 그리기도 전에 이미 마음은 어딘가에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두려움 극복 훈련 | "잘 그리지 말자"
손도 굳고 내 마음도 굳은 상태에서 나름의 극복 방법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 보았는데 그것이 “잘 그리지 말자” 이다. 잘 그리지 말아야 한다. 재미있으려고 시작했는데 고통이 되면 안 된다. 잘 그려야지 하는 순간 번민이고 하얗게 빈 종이가 태평양 한 가운데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런 식이라면 그리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 잘 그리는 사람의 그림, 유명 화가의 그림과 내 그림을 비교하면서 어떤 시도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림에 평생을 바친 사람과 내 작품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하고 괘씸한 일이다. 못그려야 정상이다(자기 최면 중).
책 소개 | 미야타 치카의 [그림 그리기 사전]
그림그리기에 도움이 많이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본인 미야타 치카의 [그림 그리기 사전].
뭔가 그리고는 싶은데 마땅히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 고민 없이 “나도 저 정도는 그릴 수 있겠다” 하는 수준의 책이다. 일러스트 위주의 그림 그리기 참고서(?)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재미있는 부분은, 저자의 나이가 나와 동갑이다. 마흔을 넘기고서는 뭔가를 한다는게 벌써 부담스러워졌다. 그런데 동갑내기 친구가 그림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니 좀더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표지에 무려 그림 2000개나 수록되어있다고 자랑할 정도니 제목을 사전으로 붙일 만 했다.
저자는 이 책이 잘 그리기 위한 책이 아니고 “즐겁게” 그리는 방법을 제시한다고 머리글에 씌어있다. 하나 하나 그림들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다. 음악은 악보가 있고 최소한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다. 박자, 음정, 세기 등등. 그런데 미술에는 그런게 없다(내 기준에서). 그 기준과 한계는 그리는 사람이 만드는게 아닐까. '이 그림은 이렇게 이렇게 그려야 한다' 등의 규칙을 따른다면 너무 따분하다. 나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잘 그리고 못그리고의 경계가 모호하다. 저자가 즐겁기 위한 책이라고는 하지만 내 스스로 만족하는 수준이 되어야 즐거움도 배가 되는데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경계도 애매하고 즐겁게 그리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조건도 다소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무려 2000개의 그림을 한땀 한땀 그린 친구, 미야타 치카씨의 뜻에 따라 즐겁게 그려보자. 애초에 잘 하지 않으려고 맘먹으면 좀 마음이 편안해진다. 예시를 보고 따라 그리면 왠지 친구와 상의할 수 있는 시험처럼 부담이 덜어지는 느낌도 있고 확실히 재미가 붙는다.
책에는 동물, 음식, 꽃과 나무, 사람의 표정과 동작, 음식 등등 책의 제목처럼 상당히 많은 그림들이 수록되어있어 따라 그리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하나 그리는데만 해도 불과 5 ~ 10분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몇 가지만 따라 그려보았다. 차근 차근 부담없이 따라 그리면 조금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쉽게 따라 그려보았는데 나름 그럴싸하다. 사무실 한 켠에서 점심 시간을 활용해 30 ~ 40분 정도 걸려서 그린 그림이다. 바다 생물은 욕심을 부린 탓에 가지수가 많아져 색칠까지 한 시간은 걸린 것 같다. 실물과 유사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특징을 캐치한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것 같은데 이래나 저래나 낙서도 그림이니까.
마음을 비우면 비울 수록 그림이 더 재미있어지는 것 같다. 게다가 스마트폰에 손과 시선을 빼앗긴 시간보다는 훨씬 갚진 시간이었다. 적어도 내가 만든 무언가가 하나 생겼다. 나는 마음에 든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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