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이 미즈마루”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울브라더
어떤 한 분야에서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이 친구와는 참 잘 통해. 마음이 잘 맞아.” 하는 평은 어떤 미사여구의 칭찬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되신 안자이 미즈마루님과 무라카미 하루키님의 이야기이다. 문학의 거장과 일러스트레이터(일러스트 뿐 아니라 여러 편의 소설과 수필을 지으신 분이기도 하다)의 거장이 오래도록 작업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공동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안자이 씨가 지은 책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책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새로운 마음가짐을 선사한다. 제목도 무척 마음에 든다. 인정받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평생을 바쳐온 분이 ‘마음을 다해 대충’ 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 다소 앞뒤가 안맞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안자이 씨만의 대충’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최대한 대충”이 아니라 “우선 마음을 다하고, 그 다음에 대충”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책의 서문에는 안자이 씨의 사망 소식을 접한 무라카미씨의 회한과 그리움이 적혀 있는데 책을 펼치면서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간 아사히에 2014년 기고한 추모글인데 ‘미처 그리지 못한 한 장의 그림’이다.
행간마다 두 분의 진지하면서도 깊은 정신적 교감, 30년 이상 지내면서 느낀 인간적인 면모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더해져 읽는 이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는데 당사자의 마음은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부탁한 [델로니어스 몽크가 있는 풍경]이라는 책 표지를 끝내 보지 못해 추모글의 제목이 ‘미처 그리지 못한 그림’이다.책의 주된 내용은 안자이씨가 지금까지 표지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에피소드, 무라카미 씨와의 인터뷰, 공동 작업에서 마음에 드는 순위 등을 기록한 것인데 서두에 언급했듯이 책 제목 선정이 정말 탁월하고 안자이씨의 스타일을 압축해서 표현할 만한 제목이다. 하지만 책 내용을 보면 단순해 보이는 그림에 오래도록 고심하는 면에서는 절대 ‘대충’ 그리는 그림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충”이라는 단어는 요즘 시대에 사실 거의 금기처럼 여기는 단어이다. 나는 가사 일을 대충 대충 한다. 그래서 아내한테 항상 혼나기 일쑤다. “제발 좀 꼼꼼하게 마무리 해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만약에 회사에서 ‘대충’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더더욱 외계인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른다. ‘사실 주변에서 꼼꼼함을 외치는 사람조차도 꼼꼼하게 일처리 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요건 비밀).’
“대충”이라는 표현은 “완벽”이라는 강박증 발병 원인과 정반대되는 표현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하고 ‘1등=최고이며 진리’라는 공식을 은연 중에 주입해왔다. 이런 지속적인 강박의 훈련 아닌 훈련이 새로운 시도의 걸림돌이자 예술가로 태어난 모든 이를 평범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잘 할 수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슬프지만 내가 그렇다.
사실 요점은 “대충”이 아니라 “마음을 다 한다는 것”과 안자이 씨의 책 표지 첫 장에 있는 문구이다. 『매력적인 그림이란 그저 잘 그린 그림만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밖에 그릴 수 없는 그림이 아닐까요. 그런걸 그려가고 싶습니다.』 그림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매력으로 독특함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기도 하다. 나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고 나만의 표현을 위한 매우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꾸준히 그리다보면 나만의 색채와 느낌이 묻어날 것이다. 그렇게 기대해본다.
안자이씨의 그림들은 따뜻한 느낌이 좋다.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상당히 오래도록 고민한다는 안자이씨는 느낌을 전하는 것에 테크닉보다 더 큰 비중을 두는 듯 하다. 무라카미씨의 단편소설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을 그린 삽화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도 그리겠네” 할 수도 있다. 펜과 잉크로 종이의 반 이상을 수직선으로 채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실행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나는 요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색연필화가 유독 눈에 띄는데 부담없이 ‘슥슥’ 그린 듯한 다소의 투박함이 더 좋다. 하루키씨의 에세이『소용돌이 고양이의 발견법』에 안자이씨가 참여한 삽화인데 고양이는 하루키씨가 학생시절에 주웠다는 사연, 보스턴에서 미국인이 말을 거는 장면을 그렸는데 매번 비슷한 하루키씨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책의 또다른 묘미는 안자이씨가 그린 하루키씨를 한 곳에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이나 행동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했지만 누가 봐도 하루키씨라고 생각 들만큼 미묘하게 여러 표정을 닮고 있다. 아마도 안자이씨의 “마음을 다해”라는 표현은 오랜 시간 대상을 지켜보며 온전히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대상을 마음 속에, 머릿 속에 이식한 뒤에는 “대충” 그려도 그 대상이 인위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몸에 베인게 아닐까.
이 책에는 더 많은 “쉬워” 보이는 그림들이 많아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그림의 기법보다 안자이씨의 그림을 대하는 자세를 배우게 된다.
1) 모델이 없다.
– 그때마다 그려야 하는 대상이 달라지므로 “특정”한 모델이 없이 즉흥성에 기반한다.
2) 대충 하는게 좋다.
– 대충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자신처럼 대충했을 때 결과가 더 좋은 경우도 있다.
3) 최고의 완성도
– ‘현시점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지향하고 잔업은 하지 않는다.
4) 노는 것과 집중하기
– 일에 몰두하되 밤이 되면 놀러 나간다.
5)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이해하는 점’
–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도 분명히 장점이 있고 직장 생활에서도 ‘매우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배울 점은 있다.
참고로 안자이씨는 일본 광고회사 “덴쓰” 라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어디선가 들어봤다 했더니 몇 년 전에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젊은 여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기사에 나왔던 그 곳이었다. 안자이씨는 회사라는 곳을 다닌다는 것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할 수 있어 장점이라고 표현했지만 뉴스 기사처럼 악몽같은 곳이기도 하다는게 씁쓸하다. 나 역시 회사에 다니는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상황도 겪어보았지만 다양성에는 극과 극의 상황도 있다는 것이 함정이라고 느낀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림이든 글쓰기든 무언가 하고 있다는게 나름 잘 하고 있다고 느꼈다.
스스로에게 격려하게 되었고 조급해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안자이씨에 대한 하루키씨의 애정이 느껴지는 문구가 있어 그 글로 마무리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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